들어가며

SH 안녕하세요. 소장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저번에 서면으로 시공자와의 에피소드를 받았었는데, 건축계에서 여성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일이라 저희가 더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소장님은 설계자로서 일을 해오신지 얼마나 되신건가요?

YO 네, 제가 벌써…20년이 됐네요.

SH 오랜기간 일을 해오시면서 많은 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YO 네 그렇죠. 서면으로 보냈던 현장소장과의 에피소드는 오래 전 일이었지만 아직도 후배들이 많이들 겪는 문제 같더라구요.

SH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시공자- 아닌걸 아니다 말했을 뿐인데

YO 제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경험이 많이 없었을 때 현장에 나간 적이 있었어요. 저는 소장님 대행으로 간 거죠. 소장님이 시킨대로 현장 소장님에게 배근에 대한 보완사항에 대한 지시를 한거죠. 그런데 저는 나이가 어렸잖아요 (그 당시에) 현장소장들은 저보다 최소 5살 이상이다보니 제 말을 귀담아 듣질 않는거예요.소규모 건축현장의 경우 건축전공이 아닌 현장시공팀에서 기술을 배워 현장소장으로 성장한 분들이 훨씬 많아요. 목구조 시공, 콘트리트 타설도 같이 하면서 주택공사도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가신 거예요. 그분들은 쌓인 경험치로 일을 하던터라 예를들면 피복두께 같은 기본 지식 없이 일을 하기도 하거든요. 그걸 지적하니 기분이 나빴나봐요. 제 말을 듣고 그런 건 처음 들어본다며 화를 내시는거예요. (웃음) 사실 처음 듣는 정보라면 들어보고 배우면 되는데...제가 설명을 하면 들으려고 하질 않았어요. 그 분 입장에선 지금 당장 앞에 있는 일을 끝내야 하는데 제가 자꾸 딴지를 걸어서 일이 늦어지고 훼방놓은다 생각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저를 무시하려 하더군요. 사실 그 일과는 별개로 현장 소장님과 저희 회사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어요. 분위기도 괜찮았구요. 그런데 어린사람이 지적하는 그 지점에 왔을 때는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화를 내고 회피하는 거죠.

SH 그런데 설계대로 하지 않으면 문제 생기지 않나요?

YO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완공은 되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일을 해왔던 거죠. 지금도요, 얘기를 해도 제대로 안 듣는 분들이 많아요. 업자들 중에는 자기 경험대로 큰 문제 없이 해왔으니 그대로 가겠다 하는 분들 많아요. 제대로 하는 시공사는 그렇게 하지 않겠죠. 하지만 조그마한 현장일수록 이런 일들이 빈번해요. 시공자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고, 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시스템의 문제일 수 도 있고.

SH 연차가 쌓이면서 시공자와의 트러블이 줄어든다고 생각하시나요?

YO 그런게 있죠. 트러블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저한테 함부로 못하는게 생기는 거죠. 우리나라는 나이에 따른 위계가 분명하잖아요. 그리고 건축사 자격증도 큰 몫을 하죠. 실력이 있건 없건, 자격증이 갖는 권한이 있으니 무시는 못하죠.

SH 소장님은 내가 여성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드셨나요?

YO 그렇죠. 그 현장 소장과의 일화에서도 그렇구요. 아무래도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다보니까 어려운 건 있어요. 가령 제가 우호적으로 접근하면 분위기가 좋죠. 그런데 도면대로, 원칙대로 할 것을 지시할 때, 그것이 돈과 연계되었을 때, 또 분위기가 안좋은 거예요. 사실 저는 시공자, 설계자 이렇게 포지션을 나눠놓고 일을 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제 입장에서는 건물을 짓는 전 과정 속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호적으로, 친구처럼 대하려고 하는데 감리라는 것은 마냥 좋게좋게 갈 수가 없잖아요. 책임을 지고 제대로 해야할 부분이 있구요. 그러다 보니 우호적으로 해야할 때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때 그 경계에서의 어려움이 있어요. 좋은 분위기에서 문제될 것은 짚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을때가 많아요.

제가 아는 분은 건축사를 너무 일찍 취득하다 보니, 실무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현장에 가서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이가 많은 남자분들이 많은 현장에서는 라이센스가 있어도 어린 여성이라서 내뱉는 말이 존중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까지도 그래요.

저는 나이를 먹었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요즘 시대에 어린나이에 현장에 투입된다 했을 때 좀 더 환경이 나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어요. 젊은 친구들은 또 다른 여러 경험을 하겠죠. 저도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SH 여성 건축인들한테 그런 고비가 오는데, 헤쳐나갈 방법이나 이런 사태를 막는 시스템이 구축이 되지 않다보니까 많이들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YO 그렇죠. 저도 이런 고비를 친구들에게 푸념하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개인적인 일로 풀고 넘어 갔지, 동종업계의 동료들과 고민을 공유하지는 못했어요. 건축업계에 여성이 많지 않던 상황이라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지 않았어요. 일과 업무 위주의 시스템 때문이겠죠. 설계는 업무량이 굉장히 많고, 여성 비율이 늘어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수는 아니니까 소통할 기회가 없었어요.

SH 지금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SOFA 내부에서도 실무자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싶은데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분들은 적다고 느끼거든요. 저만해도 막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다보니 이 프로젝트에도 시간을 내기가 어렵더라구요.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이런 고민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체감할 여유가 없고, 그저 버텨야 할 문제로 보게 되구요.

YO 네 지금 당장 힘들다 보니 개인적으로밖에 고통을 승화시킬 수밖에 없는거에요. 거의 뭐 초월이라고 할까요, 아 저 사람이 많이 힘든가보다 하면서 정신승리하고 넘어가게 되는거예요 (웃음)

아뜰리에에서 일하다 보니 소장님 대신 제가 해야할 일도 생기면서 이런 문제가 생긴거지만, 어쨌든 ‘더 빨리 배우게 되니까 된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텼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일단 이것 저것 부딪히면서 배우는 그런 시스템이 초년생 실무자에게 너무 힘들죠. 단계별로 배우면서 현장이 돌아가는 시스템과 감리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현장에 나가게 되면 좀 더 수월하게 고비를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돈문제도 연관이 있어요. 요즘은 상주감리를 많이 하고, 자격이 있는 소장이 가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그럼 페이가 많이 드니까, 비용을 조금 주고 어린 친구들을 보내요. 그런 시스템 때문에 초년생들이 별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을 겪게 되는 거에요.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인식, 대우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시공현장에는 남자가 다수이고, 그 안에서 잘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아요.


민원인- 민원의 굴레

SH 성차별을 느낀 경험 외에도 협력관계에서 겪었던 당황스러웠던 일화가 있으셨나요?

YO 얼마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설계한 공공건축물에 민원을 넣었던 주민분이 관련 업계분이시더라고요. 옥상에 태양광 발전시설 구조물을 만들어 옥상휴게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는데, 민원인이 전망을 가리니까 계획수정을 요구했었어요. 이런일도 발생할 수 있구나 하고 당황스러웠어요.

SH 민원인과 소장님 사이에 공무원 없이 직접 대면하셨던 건가요?

YO 처음엔 공무원과 다른 건축사분이 중재를 했었는데 한번은 만나야 했어요. 결국은 민원인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어요. 민간 주택가에 들어가는 공공시설은 철저하게 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공시설 설계는 공공성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러기 정말 어려워요. 주민시설이었고 옥상을 잘 활용하기를 바랐는데, 민원인 입장은 불특정 다수가 옥상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다는 거였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로 설계를 하고 설득을 해도 그 지점은 타협이 안 되더라고요. 밀집한 주거지에 공공시설을 짓게 될 때, 사유지에 대한 배려는 특히 더 신경써야하는 걸 배운 계기이기도 했어요. 공공에서 발주한 공공시설이라 더욱 주민의 의견을 안 들어주기가 쉽지 않아요. 설득을 하려 하면 민원인도 언론 같은 다른 수를 두죠. 인근의 사적 영역에 피해를 주면 안 되고, 애초에 건축주들끼리 분쟁이 나게 설계를 해서는 안되죠. 법과 보이지 않는 커뮤니티와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걸 유지하는 선에서 설계를 해야해요.


나가며

SH 지금 20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건축업계의 분위기나 시스템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YO 환경이 좋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우리나라 건축은 거의 법이 정하는 것 같고요. 공공건축만해도 건축가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쉽지않아요. 고려해야 할게 너무 많죠. 건축주에게 가져다 줄 이득, 법, 비용 이런것들이 얽혀 있으니까요. 법도 지자체에 따라 차이가 많고, 어떤 경우는 디자인이 존중이 되지 않고, 비상식적인 심의자에 의해 고생을 하거나 엉뚱한 결과를 맞게 되기도 하구요.

SH 소장님이 느끼시기에 이 업계에서 오래 잘 버티려면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YO 건축일을 시작하게 된 분들은 누구나 이걸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지만, 학교에서 배운 건축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그 지점이 견디기 어려운 분들은 버티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하지만 건축 안에서도 여러가지 일이 있잖아요. 여러 길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이게 좋아서 하는 이상 분명히 나의 작업에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분들이 생겨요.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굉장히 보람되죠. 이 세상에 수많은 건축가가 있는데 누군가는 나와 통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힘을 얻고 일을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도 생각하게 되요. 일은 일로써 성실히 해나가는 자세로 꾸준히 쌓여갔을 때, 좋은 커리어를 갖게 된 주변 사례들도 많이 봅니다. 그리고 선배의 역할도 중요하죠. 앞서 말했듯이 현장에서 겪어본 일들이 있잖아요. 내가 당시 느꼈던 문제와 해결점을 고민한 구석이 있으니까, 여성 후배들은 그런 일들을 덜 겪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싶어요.